버킷리스트를 행동으로 실천하라 – 소설가 이재욱 ( 1 )

경기도 부천시 성곡동행정복지센터 별관 주민자치위원회. 매주 목요일 오후 2시가 되면 30대에서 70대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층의 주민들이 이곳 회의실에 모여 강의를 듣는다. 프로그램명은 <나도 작가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글쓰기 강좌다. 4년 째 지속되고 있을 만큼 호응도가 높단다.

강사는 사업가로 활동하다 은퇴 후 소설가로 전업한 이재욱(72) 작가. 2006년 부천신인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등단, <귀천의 길목> <아버지의 가슴앓이> <연탄 두 장의 행복> <왕의 연인>, 공저<호모헌드레드와 문화산업>을 발표하는 등 제2의 인생을 구가하고 있는 그를 만나보았다.

어려서부터 소설가를 꿈꾸다

▶많은 사람들은 짧은 글을 쓰는 것도 어려워할 정도로 글쓰기는 쉽지 않은 장르인데 사업을 하다 소설가가 되셨다니, 원래부터 글을 좀 쓰셨는지요?

-네. 어릴 때부터 글쓰기에 재능이 좀 있었어요. 사실 등단은 중학교 3학년 때 했습니다. 충청일보 신춘문예에 <우정>이란 단편소설로 입선했어요. 상을 받으러가니까 너무 어린 학생이라며 ‘가작(입선)’이라 표기하고 ‘학생부’를 덧붙이더군요. 원래 가작이란 것도 없고 학생부라는 거 자체도 없었는데요. 하지만 다음해에 동화를 응모했고 당선작으로 채택되었어요.

▶그럼 그때부터 작가가 꿈이셨나요?

-꿈이 두 개였어요. 하나는 소설가, 다른 하나는 선생님. 작가로서 먹고 살기 힘드니까 선생님을 하면서 작가생활을 하면 되겠다 그런 생각이었죠. 집이 가난해서 고등학교는 단양공고를 갔는데 담임선생님께서 같은 단양 출신 시인인 조남두 작가가 교사로 재직 중인 장충고로 전학하는 게 좋겠다고 권유하셨어요. 그래서 고1 말부터 숙부님 댁에서 지내면서 장충고를 다녔죠. 조남두 선생님은 가을마다 문학의 밤 같은 교내 행사를 주최해서 다른 학교에서도 글 잘 쓰는 학생들, 학원사의 <학원>에 투고하는 친구들도 섭외하면서 교내 문학활동을 이끄셨어요. 저도 그런 활동에 참여하면서 작가로서의 꿈을 키웠죠.

그래서 대학도 국문과에 갔어요. 사대로 가란 권유도 있었지만 국문과에서 교육과정 이수하면 2급 정교사자격증도 받으니까요. 대학에서도 학보 문예작품 모집 등에 응모해서 후보작까지 오르기도 했어요. 하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워 학교만 간신히 다니던 때라 기본 생활이 안 되니 매사 자신이 없고 공부든 글이든 집중하지 못한 채 방황했던 시기였어요.

생활전선에 뛰어들다

-졸업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샘터출판사 편집국장이 장충동에 사무실을 내고 보조 작가를 모집하더라고요. 당장 갔죠.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입사해서 ‘한국의 모상’이란 책 집필을 도왔는데 4개월 정도 있다가 사장과 갈등이 생겨 그만두고 단양으로 돌아왔어요.

백수로 있는 동안 주변을 살펴보니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애들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14~17세 청소년 7,80 여 명을 모아 ‘재건중학교’를 열고 입대하기 전까지 3년 정도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국어를 제외한 다른 과목 교사는 당시 진주에 주둔 중인 전투경찰에 요청해서 보충했고요.

그 때 가르친 학생 중 하나는 서울로 가서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들어가 강남지역 은행 대리가 되고, 하나는 부천 중동의 큰 전자회사 공장 생산과장, 하나는 서울시의회 의원이 되었어요. 환갑 땐가, 제자들이 찾아와 감사하다며 몇 번 자리를 마련하더라고요. 재건 중학교에서 배우지 않았다면 지금의 자기들은 없었을 거라고, 모두 선생님 덕분이라고. 잠깐이지만 교사로서의 보람도 맛본 시간이었어요.

그러고 보니 아내도 그 시절에 만났어요. 학교 운영 때문에 단양과 진주를 오가다 동네 아가씨 하나와 친해졌는데 그 사람이 아내가 되었거든요.

남자든 여자든 인생의 큰 전환점은 결혼이다. 가정을 꾸리는 순간, 개인의 꿈보다 가장이란 책임이 앞서게 된다. 이재욱 작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제대 후 가족을 부양해야하는데 전공을 살린 직업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 당장 굶어죽을 판에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어디 있을까. 고모부가 이사로 있던, 대구의 합성피혁 생산수출회사에 들어가 생산부 자재관리를 맡았다. 말이 자재관리였지 창고 경비 서는 일이었다.

그런데 투자자가 재일교포였고 일본기술자들이 기계를 설치했기 때문에 자연히 일본어를 익히게 되었단다. 월남전이 끝난 직후 주베트남대사관 여직원이 한국에 들어와 잠시 사택에 머무르면서 영어까지 배울 기회를 얻었다. 결국 일어와 영어 모두 구사하게 되면서 무역부로 이동, 원자재 통관·수출품 통관·관세 환급 등 무역 업무를 전담했다. 그때 얻은 지식과 경험을 살려 친구와 동업을 하기도 하고 개인 회사를 차리는 등 사업가로 변신했지만 부도나서 폐업하고 1983년 부천으로 이주, 특허비닐생산업체에서 전무이사로 근무하다 은퇴했다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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